액트 오브 킬링, 영화 속 기억의 재구성, 전대미문의 다큐멘터리 (가해자, 진실,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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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은 가해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진실’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 1965년 반공 학살을 저지른 자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재연하면서 보여주는 왜곡된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이끌어냅니다. 본 글에서는 ‘가해자’, ‘진실’, ‘왜곡’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가 기억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조립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학살의 주체가 되다: 가해자의 서사화
영화 ‘엑트 오브 킬링’에서 가장 충격적인 점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중심에 둔 내러티브입니다. 이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구조에서 벗어나, 윤리적 경계와 감정적 공감의 구도를 뒤흔드는 선택입니다. 영화는 안와르 콩고를 포함한 수십 명의 전직 민병대원들이 등장하여,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영화 형식으로 재연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이들은 전혀 죄책감이 없어 보이며, 오히려 그 행위를 ‘영웅적 무용담’처럼 떠들고 다닙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기억 구조가 왜곡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가해자가 자신의 기억을 무대화하고 연출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용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서 구조적 폭력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인도네시아 사회에서는 학살의 주체들이 오늘날까지도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피해자들은 여전히 침묵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가해자들은 자발적으로 학살 장면을 연기하면서도 그 기억에 대해 비판받을 걱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안와르 콩고의 심경에는 서서히 균열이 생깁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연기한 장면들을 되돌아보며 혼란에 빠지고, 결국 한 장면에서는 구토를 하며 괴로워합니다. 이는 단순한 반성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한 신화가 붕괴되는 순간을 상징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영웅 서사로 믿고 있었던 가해자는, 반복된 재연을 통해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진 죄책감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간적이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진실은 누구의 시선에서 만들어지는가
‘엑트 오브 킬링’은 진실의 주체와 구성 방식에 대해 도전적인 시선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흔히 진실을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로 간주하지만, 이 영화는 그 진실이 언제든지 권력과 맥락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은 학살의 과정을 연출하고 연기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과거를 ‘정당화’하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닌, 권위와 자기 이미지 보호에 기초한 해석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자주 발생합니다. 승자의 논리로 역사가 기록되고, 그에 따라 기억되는 방식도 왜곡됩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오랜 시간 동안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교육 시스템에서도 관련 내용을 배제하거나 왜곡된 형태로 가르쳐 왔습니다. 이로 인해 가해자들은 오히려 ‘국가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하며, 그들의 기억은 검증 없이 사회적으로 재생산됩니다.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이들의 기억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매우 정교하게 포착합니다. 그는 가해자들이 ‘자기 미화’를 위해 사용하는 언어, 몸짓, 연출 스타일에 집중하며, 그 안에 숨겨진 자기기만과 진실 회피의 심리를 드러냅니다. 또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활용해 인터뷰 장면과 연기 장면을 병치함으로써, 관객이 진실을 상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진실이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힘의 작용에 의해 생성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폭로를 넘어 ‘기억 정치학’을 탐구하는 매우 정치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습니다. 관객은 영화의 진행과 함께 진실이란 결국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형태를 달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며, 그것이 주는 윤리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기억의 허상, 왜곡된 자아의 투사
기억은 결코 과거의 단순한 복사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의 자아 상태와 환경, 심리적 방어기제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가변적인 구조입니다. ‘엑트 오브 킬링’은 바로 이 기억의 불완전성과 왜곡 가능성에 집중합니다. 가해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영화화’하면서, 현실보다 더욱 극적이고 화려하게 연출합니다. 학살 장면에 코미디 요소를 가미하거나 뮤지컬 형식으로 구성하는 장면은, 현실의 참혹함을 외면하고자 하는 심리적 기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기억 자체가 얼마나 쉽게 허구로 변형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왜곡은 자아 보호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직면하기보다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국가의 명령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위험했다” 등의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은, 심리적 방어기제인 합리화(rationalization)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합리화는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에서 억눌린 감정과 불안이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왜곡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국가 권력과 미디어, 교육 시스템이 특정 기억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침묵시키는 방식은, 집단 기억을 왜곡시키는 대표적인 구조적 문제입니다. ‘엑트 오브 킬링’은 이를 통해 집단적 기억의 형성 과정에 개입하는 권력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있으며, 이는 단지 인도네시아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인 공통 과제입니다. 감독은 가해자들이 왜곡된 기억 속에 안주하면서도, 점차 그 환상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연기한 학살 장면을 다시 보며 심각한 감정적 동요를 보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구토를 합니다. 이 장면은 기억의 허상이 무너지고, 현실의 무게가 그의 감정을 덮치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으로, 영화 전체의 클라이맥스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엑트 오브 킬링’은 기억과 진실의 경계에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과거를 직면하고, 왜곡하고, 때로는 회피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다큐멘터리입니다. 가해자의 시선에서 출발해, 진실의 다면성과 기억의 정치성을 파고드는 이 작품은 단지 과거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회적 기억 속에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 충격과 울림을 꼭 한 번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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